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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마고우 오성과 한음

기사입력 2022.05.28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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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열린정책뉴스] 오성과 한음의 도시 포천은 국립수목원 등 천혜의 비경과 아름다운 관광명소가 많은 도시로 이름난 곳이다. 한탄강 하늘다리, 비둘기낭 폭포 , 이항복 선생의 묘지, 구한말 항일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 선생과 우국지사 염재 최면식 선생을 제향하고 있는 사당을 보고 왔다.
     
    20220523144937_7ebec514f400f7749f3dc91bec3ee3a2_o6fr.jpg김현태 열린정책뉴스 논설위원

     


    '죽마고우 오성과 한음'의 저자 '이한'은 오성과 한음의 유년시절, 청년시절, 임진왜란과 시대, 광해군 등 역사적 배경과 사례별로 이해하기 쉽도록 글을 써 주신 작가에게 감사 드린다.

    이책을 통해서 영원히 어른이 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사실 혹독한 가난을 겪고 일어나 당파싸움, 임진왜란과 광해군 시대라는 겪류를 거치면서 열정적으로 살아왔던 이들을 소상하게 알게 해주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오성과 한음은 너무나도 다르니까 한편으로는 낯설고 신기하다. 오성은 그나마 크게 다른 느낌이 아니었지만, 엄격한 성미의 한음은 생소하게 다가 왔다. 더구나 두 사람의 우정도 친구라기보다 형과 동생, 그러면서도 조금은 일방적인 사이였다. 어째서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가 수백 년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악동 오성과 한음 뿐만아니라 그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고, 세상의 고초를 겪기도 하고, 마침내 생명이 사그라지는 순간까지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재미난 농담을 하며 꺾이지 않고 살다 갔는지 조금은 알것 같다. 오성과 한음은 그들의 인생에서 그렇게 즐거울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가난으로 고통받은 어린 시절, 정쟁 가득한 관직 생활, 그리고 전쟁까지 겪었다. 그래서 오성의 농담을 높게 평가하는지 모른다. 세상의 쓴맛 모진 맛을 다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어찌 그저 실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는가?

    옛날 옛적 똑똑하고 장난을 좋아하면서도 재주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둘은 친한 친구였고, 곤경에 빠진 다른 친구를 구해 주기도 하며, 때로 못된 어른들을 골탕먹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 둘은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람이라면 곧잘 아는 오성과 한음 이야기다. 원래부터 오성은 꽤나 유머감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선조와 광해군 시기에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오성을 두고 '농담을 잘 했다' 라고 적고 있다. 역사상 둘은 비록 결혼한 이후에 만나 친구가 되었고, 나이 차이도 다섯 살이나 났다. 그러나 '어린 오성과 한음'의 명성에 부족하기는 커녕 이를 초월하는 평생의 친구였다.

    오성 이항복의 호는 처음에는 '필운' 이었다가 나중에 '백사'를 썼는데,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란을 잘 인도하였다 하여 공신이 되고 오성군에 봉해졌다. 그 다음에는 명나라와의 골칫거리 외교문제가 터졌을 때 사신으로 가서 이를 잘 해결한 상으로 부원군에 봉해졌으니, 그리하여 오성부원군이 되었다. 즉 오성은 공식 호칭이지 호가 아니다.

    한음 이덕형은 오성이 태어나고 5년 뒤인 1561년에 태어났다. 이덕형이라는 이름보다 그의 호인 한음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오성과 한음은 어릴 적부터 재주가 많고 영리했으며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오성은 굉장히 유쾌하고 재미난 사람이었다. 한음은 깍아 놓은 것처럼 빈틈없고 딱딱한 사람이었으며, 그러면서도 삐죽하게 쏘는 성미 덕에 짜증을 잘 냈다. 따라서 대인관계가 협소한 것은 당연한 순리이며, 훌륭한 사람이긴 하되 곁에서 지내면 힘들고 피곤해지는 사람이다. 한음은 날카롭고 공격적인 상소를 올리거나 명나라 장수와 한판 붙기도 했다. 그러나 화를 내야 할 때 내는 것이니 흠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며 정정당당한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 이몽량은 우찬성을 지낸 인물이고, 어머니는 최씨로 눌현 이사균의 외손녀이자 최륜의 딸이었다. 원래 오성의 어머니는 후처였다. 이몽량이 첫 번째 부인을 잃은 뒤 최씨에게 다시 장가들었던 것이다.

    희대의 재담꾼 오성의 유년은 불우하고 가난했으며, 그 자신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년 후 새로운 가족과 친구를 얻게 되니 하나는 결혼이고, 하나는 한음과의 만남이었다. 천성이 이야기꾼이라 잔뜩 털어놓는 오성과 달리 한음은 할말만 하고 안할 말은 하질 않았다. 한음의 아버지는 이민성이고, 어머니는 현령 이례선의 딸이었다. 유년 시절 오성과 한음의 공통점은 가난이었다. 일찍부모를 여윈 오성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한음의 집안에서는 위로 3대 동안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가난 속에서 감정 표현이 드물고 예의가 발랐기에 주변 아이들이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 한음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했고 천재였다. 여덟 살 때 '소학'을 뗐고, 당대의 명문장이었던 봉래 양사언 등이 한음이 지은 시를 보고 자신의 스승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오성과 한음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는 혼례였다. 오성의 장인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였던 권율이고, 한음의 장인은 영의정이자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이다.

    오성과 한음은 어린 시절에는 만난 적도 없었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친구였고, 주변 모두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578년이 되서야 한음은 오성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한음은 과거에 급제했다. 과거가 만들어 준 인연이었을까? 그런데 둘은 같은 과거만 보았을 뿐 같이 합격하지 않았지만 둘은 친구가되었다. 관직 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천재 한음이었다. 오성과 만난 첫해, 한음은 생원, 진사 과거 시험에 연달아 붙었다. 생원시에서는 1등 장원을, 진사시에서는 3등을 차지한 우수한 성적이었다.

    이렇게 한음이 승승장구하며 나아가고 있을 때, 오성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오성은 한음보다 이른 1575년에 진사초시에 합격했고, 이때 3등으로 급제했으니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회시에서 떨어지고 몇 번 낙방이 계속 되었다. 이윽고 1580년, 오성과 한음은 모두 대과에 급제했다. 한음은 부묘별시에서 을과 1등인 전체 석차 4등으로 뽑혔다. 과거에 합격한 이래 두 사람의처음 직책은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임금과 함께 통감을 읽고 공부하는 다섯 사람 중에 뽑혔다. 그리고 1583년에는 오성과 한음, 두사람이 나란히 사가독서란 집에 머물면서 책을 읽는다는 뜻이니 재택공부를 의미하며, 관리의 신분은 유지하되 집에서 공부만 해도 급료가 나왔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당시 오성의 나이는 서른일곱, 한음은 서른두 살이었고, 젊은 관리로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고있는 즈음이었다. 전쟁 개시와 더불어 들끊는 솥 안처럼 어지러운 혼란에 빠졌고, 오성과 한음 역시 여기에 휘말렸다. 조선도 어느정도 대비를 했으니, 대표적인 조치가 바로 북쪽 변두리에 묻혀 있던 이순신을 발탁해 전라좌수영에 앉힌 것이다.

    짧고 긴박하긴 했지만, 오성과 한음의 이별은 애절했다. 친구끼리 이러한데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은 또 어떠했을까. 왜란이 터지기 직전, 권율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역관이 유언비어를 떠뜨렸는데 여기에 연루된 탓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고, 각지의 관리들이 용감하게 싸우기는 커녕 재산과 식솔을 수레에 싣고 도망가자 당장 일손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권율은 석방되어 광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오성이 임진왜란 중 겪은 고통이란 결코작은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오성은 자신의 가족들마저 팽게치고 임금을 모셨다. 장인인 권율은 그보다도 한 발 먼저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남쪽 임지로 떠났다. 한음은 오성 보다도 더욱 급히 출발해야 했으니 제대로 인사할 겨를도 없었다. 이씨 부인은 시부모님과 아이들을 데리고 피란을 떠나 안협의 깊고 깊은 산골에서 숨어 살았다. 이런 변고는 명나라에서 갓 돌아온 한음에게 전해졌고, 당시 대제학이던 한음은 사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아버지와 그럭저럭 연락이 닿았지만, 어머니와는 소식이 끊겨 불안한 나머지 직접 가족들에게 달려가고 싶은 심정을 절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선조는 나랏일이 급하고, 한음의 능력이 중요하니 개인 사정을 봐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막았다.

    두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오성은 나라의 병권을 주재하는 병조판서 직책을 맡고 있었다. 훗날 도원수가 되는 장인 권율과 더불어 병조의 실세가 되었다.

    한음은 선조가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세자 광해군이즉위해 조선의 인심을 규합하고 나라의 위신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한음의 이 말은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이번에도 한음을 말린 것은 오성이었는데, 이들 둘이 한 이불 속에 있었고, 엿듣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좌절을 겪으면 의기소침해질 법도 하건만, 오성과 한음 둘 중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힘든 하루를 맟고 나서 잠자리에 들 무렵, 또다시 두 사람은 나랏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토론을 벌였다. 두 사람은 한밤중에 선조를 찾아가 명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왜군은 평양마저 위협하고 있어 선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근심 걱정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던 차였기에 오성과 한음의 의견을 받아들어졌다. 모든 건 하늘의 뜻이라는 운명론인 듯도 하지만, 한음의 손을 들어 주는 말이다. 선조는 여기에 따랐고, 중국으로 파견되는 청원사로 한음이 임명되었다.이 결정에는 오성이 병조판서 일도 맡고 있었거니와, 한음이 이전 외교 부문에서 성과를 올린 경력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곧 두 사람의 이별을 의미 했다.

    오성과 한음이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분골쇄신 일하며 노력했음을 그 누가 부정할까. 이렇게 괴롭고 힘들어도 우스갯소리를 하는 여유를 간직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이렇게 두 사람이 이리저리 뛰고 고생하는 동안, 한음의 장인인 이산해는 피란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삭탈관직 되고, 평해로 귀향을 떠났다. 그리고 5년 뒤에야 정계에 복귀하여 다시 영의정이 되니, 초반에는 그다지 활약은 없었다. 그에 비해 오성의 장인인 권율은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대활약을 하고 있었다.

    오성이 젊었을 시절에는 당파싸움이 심하진 않았다. 그러나 차츰 동서남북으로 쪼개지고, 이 중 북인은 대중소북으로 나눠지는 정국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오성 본인은 당파가 없는 사람으로 남은 것도 대단하거니와 여전히 우정을 나누었다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한음과는 전설적인 우정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친구로는 이호민, 한준겸 등이 있고, 직장동료로는 유성룡, 윤두수, 신흠 등이 있다. 늘그막에 사귄 후배 혹은 제자로는 최명길, 정충신 등 병자호란 이후로 활약한 사람들이 있다.

    영의정 자리를 두고 한 사람의 아래요, 만 사람의 위라고 표현하던가. 오성과 한음은 모두 정승의 자리를 역임했는데 이번에도 앞선 것은 한음이었다. 그가 우의정이 된 때는 한창 전쟁 중이었던 1597년 서른일곱 살 때로, 대제학이 되었을 때만큼이나 기록적으로 젊었다.

    기나긴 조선 역사상 20대 초반에 영의정이 되었던 사람으로 세조 때에 구성군 이준이 있지만, 그는 종실로 세조의 편애를 받은 덕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한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력과 실적을 합쳐 정승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훗날 영조 즈음에는 20대 때 정승이 되었다는 헛소문마저 돌았다. 그거야 어떻든 한음의 승진을 축하해 주는 것은 오성이었다.

    1608년, 여러모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살았던 선조가 승하하고 세자 광해군이 즉위했다. 이제 오성과 한음도 어느새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것이다. 원래부터 당파가 없기로 이름났던 오성과 한음이 무시무시하게 비난당하고 축출당했다는 사실은 광해군 시대가 얼마나 골치 아픈 때인지 기늠할 수 있게 해 준다. 농담 한 마디 통하지않고, 내 편이 아니라면 모조리 쫒아내는 극단밖에 남지 않은 세상이 어떻게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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