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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보수, '적이 아닌 사회가 나아갈 방향'

기사입력 2021.05.0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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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와 협치 기대...상생해야

    [칼럼=열린정책신문] 오늘 우리 사회는 분열과 불신이 넘쳐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서울과 지방, 경상도와 전라도,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서로 대결하고 있다. 좌와 우, 선과 악, 너와 나인 가운데 세상은 극단적 증오 상태에 빠져 있다. 모두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한다. 지금처럼 자신들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막무가내로 떠드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하나의 정책이 시행되기도 전에 그 정책은 틀렸다고 하고, 어떤 정책은 전 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이라고 무조건 부정하기도 한다. 반목과 충돌이 일상화되어 갈등이 굳어졌다. 모두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하지만, 누가 옳고 누가 틀렸겠는가? 우리가 모두 옳든가 틀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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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종 경찰학박사(전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겸임교수)

     

    2019년 8월 조국 사태는 큰 사회적 혼돈상태를 경험케 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조국이 비록 도덕적 흠결이 좀 있다 하더라도 법무부장관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을 하였다. 이에 비해, 야당과 반문재인 진영에서는 조국은 사노맹 출신이고, 특정 사학재단의 이익을 대변했고, 인턴증명서를 위조한 점들을 들어 자격 미달이라는 도덕적 논리를 내세웠다. 조국 지지자들은 정치적 프레임을, 그 반대자들은 도덕적 프레임을 가지고 서로 공격했다. 검찰개혁을 외치며 서초동 집회에 나와 있는 사람들과 조국 사퇴를 외치며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간에는 정치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차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각자 자기가 너무나 옳기 때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020년 7월 사망했다. 그의 죽음 앞에 2차 가해와 망자 조롱이라는 반사회적 현상이 나타났다. 성추행을 대하는 태도가 진영에 따라 180도 달라진다. 여당은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고 명칭 함으로써 피해 사실을 축소, 왜곡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야당은 권력이 있으면 성폭력을 해도 괜찮고, 피해자가 계속 2차 가해를 받는 것이 법치주의냐고 반박하였다. 고 박 시장의 장례식을 두고도 의견이 양분되었다. 서울 특별시장 장을 마련한 서울 시는 9년간 서울시정을 이끈 공헌 예우를 말하고, 이를 반대한 쪽은 성추행으로 고발된 사람에 대하여 합당치 않고, 국민 세금을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한다. 박 시장을 옹호하는 측은 박 시장의 공만 추켜세우고, 그 반대편은 그의 파렴치한 이중성을 비난한다. 여와 야의 극한 대치는 조국 사태와 박원순 사망 사건뿐만 아니라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갈등에서도 나타났고, 백선엽 장군의 장지를 국립묘지로 하느냐, 대전현충원으로 하느냐를 두고서도 죽음이 정쟁의 도구가 되어 여야가 대립하였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국 사태, 박원순 사망 사건, 추미애와 윤석열 등 사건을 보면, 모두가 이분법적 사고, 진영논리에 갇혀있다. 진영논리는 자기가 속한 조직이념은 정의의 기준이 되고, 상대방은 무조건 불의라는 것이 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냉소하고, 경멸하고, 무례하게 굴어서 일반 사람들의 주의와 시선을 끄는 전략이다. 이와 같은 전략은 지지층만 바라보면서,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하여 선동하는 것으로 편 가르기에 연유하고 있다. 우리는 대화와 토론을 하여야 한다.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상대방을 존중하고 겸손함을 보이는 것이 타협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선에 이르게 된다. 완벽한 타협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타협은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해 내고 양쪽 모두를 나아지게 만든다. 이것이 협치의 길이다. 자기편만 옳다는 진영논리, 상대에 대한 악감정, 자기편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망을 벗어버리고, 이성을 갖추고 객관성을 토대로 대화와 토론을 하여야 한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논쟁은 보수의 시조라고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와 진보의 대부인 토머스 페인이 벌린 ‘보수와 진보의 탄생’의 위대한 논쟁에서 간파할 수 있다. 버크는 보수주의로 안정과 변화 사이에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질서, 의무, 개량, 신중함을 추구한다. 대신 진보주의인 페인은 평등과 자유에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자유, 선택, 혁신을 추구한다. 버크는 끊임없는 변화와 전망을 다루며 신중하고 점진적인 변화와 질서를 추구하고, 페인은 정의에 대해 호소하고 급진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버크는 현재는 과거의 유산을 받는 동시에 미래와의 관계를 맺기 때문에 현재의 의무를 중시하고, 페인은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기보다는 현재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선택을 중시한다. 페인이 정부의 최우선 의무를 개인적 선택의 보호와 대중의 의지에 대한 권위부여로 보았다면, 버크의 의무는 사회적 관계 및 유산이라는 그물망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것이다.


    버크와 페인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논쟁에서부터 분명한 시각차를 보인다. 버크는 혁명에서 혼돈과 테러를 목격했지만 페인은 합법적인 정부와 권리가 확대되는 것을 보았다. 페인은 타고난 자유를 되찾기 위해 혁명을 찬성했고, 버크는 세상의 자연적 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혁명을 반대하였다. 버크는 급진적이거나 근본적이기보다 원만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진척시켰고, 항시 기존제도 및 관례에 대한 존중을 요구했다. 건설적 변화란 안정이 필요하므로 개혁은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인은 계몽주의적 자유주의 시각을 가지고 개인의 권리 신장에 대하여 노력했고, 정부는 이 권리의 수호자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개인 권리 침해에 대하여 분노하고, 약자를 보호하는데, 열정을 바쳤다.


    우리나라 진보와 보수를 살펴보자.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성장, 분배, 자유, 평등 요소가 핵심이 된다. 이념 면에서, 보수는 자유, 안정, 성장을 중시하고, 진보는 변화, 평등, 분배에 더 무게를 둔다. 보수는 경쟁력과 효율성을, 진보는 연대와 공평성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보수는 시장주의에 친하고, 진보는 사회안전망에 더 관심을 둔다. 북한에 대하여서도 진보는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선호하고, 보수는 북한 인권과 세습체제를 비판한다. 북한 비핵화에 대해서도 차이를 보인다. 외교도 보수는 한미동맹을 최우선으로 하고, 진보는 북한과 중국에 공을 들인다. 역사에서도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일제 식민 체제에 대하여 의견이 갈려 있다. 지역균형발전과 관련하여 보수는 분권을, 진보는 분산을 중시한다. 대한민국의 지난 70년을 보면, 보수는 산업화를 성취했고 진보는 민주화를 이끌었다.


    사회학을 창시한 오귀스트 콩트는 진보와 보수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질서는 언제나 진보의 조건이고 진보는 질서의 필연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보수의 자유와 안정은 변화와 연결되어야 하고, 진보의 평등과 변화는 질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그 정치 이상은 더 살기 좋은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상과 목적은 같고, 수단과 방법이 다를 뿐이다. 한국갤럽이 4월 유권자 성향을 분석한 결과, 진보와 보수는 각각 26%로 같은 비율이었고, 중도가 33%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도층 표심이 중요해졌다. 유권자 표심을 얻기 위해서도 협치가 요구된다. 여당과 야당은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협치하고 상생하고 대화하여야 한다. 유권자인 국민은 이를 지켜볼 것이고, 그 심판은 국민의 투표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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