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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애국자가 되고 싶다

기사입력 2022.02.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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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새로 읽기를 보며...
    [칼럼=김현태 열정뉴스 논설위원] 나는 초·중학교때 배웠던 3·1운동에 대해서 독립운동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뿐 구체적으로 3·1운동을 하면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참 모습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것 같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그 진가를 모르거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몰랐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 고귀한 목숨을 바치신 분들에게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예지'에서 펴낸 이땅의 젊은이들을 위한 '3·1운동 새로 읽기' 책을 통해서 3·1운동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힘을 하나로 결집할 때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 그 폭발력을 똑똑히 보여준 일대 장거였다. 3·1운동은 우리 근대사를 세계사 속에서 바라보게 한 시작'이며 우리나라를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존재케 한 원류다. 3·1정신은 나라 없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 민중이 어두운 억압의 시대에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지혜의 길로 나설 줄 알았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며, 우리국민이 영원히 기억하고 재해석해야 할 '큰 산'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든지 읽어야 할 소중한 나침판으로 3·1운동의 원인을 살펴본다.

    첫째, 조선의 쇠락과 일본의 국권 침탈로 사대부의 부정부패 이다.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임진왜란과 청의 침입을 발았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풍의 맥이 끊어지고, 통치자인 왕실의 무능과 집권층인 사대부의 부정부패에 시달리며 삶의 터전을 잃은 하층민들의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운동 같은 항쟁에 크게 호응했다.

    둘째, 조선 왕실의 무능이다. 조선 왕실은 명을 받드는 반청숭명의 중화사상에 치우쳐 당시 급부상하고 있던 서양열강들의 움직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고, 일본의 재침략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다. 특히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 완패했고, 일본이 류큐왕국을 강제병합하는 것을 보면서도 조선 왕실이 근본적인 보위책을 세우지 못했다.

    셋째, 자주적 근대화를 차단한 쇄국이다. 1863년 홍선대원군 이하응은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국가의 행정조직과 권한을 개혁하고, 탐관오리들을 숙청헀다.

    아울러 프랑스 병인양요와 미국 신미양요의 함대가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함대의 협박으로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했다. 1873년 10년에 걸친 대원군의 집귄이 끝나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가인 민씨세력이 집권했다. 일본과 맺은 불평등조약으로 외국상품의 수입, 미곡의 유출 등으로 조선은 농촌경제는 물론 상업 전반에 타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30년도 안되어 조선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권마저 강탈당하고 말았다.

    넷째, 한반도를 향한 열강들의 야욕이다.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고,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덩달아 심화되자 1893년 농민들은 동학의 교세를 바탕으로 반침략·반봉건투쟁인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일본을 견제하는데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에 일본은 1895년 미우라고로를 일본 공사로 보내 일본수비대, 낭인들과 함께 경북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하였다.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국제적 인정을 받고 11월17일 이토히로부미는 조정을 강박해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다섯째, 조선의 항거이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된 후에는 농민들이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의병운동으로 저항했는데, 훗날 항일독립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는 1897년 민중과 함께 독립문을 건립하고, 1898년 만인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운동을 펼쳐 힘을 쏟아부었다. 을사조약체결  2년 후인 1907년 6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강요로 조약에 조인한 것임을 알리고자 했다. 1909년 19월 26일 중국에서는 안중근이 만주 침략을 꿈꾸던 일본의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고 유언을 남겼다.

    여섯째, 일본의 수탈과 무단통치이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한민족이 겪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1910년 10월부터 악랄한 총독정치와 군대·경찰을 무단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농토를 강탈했고, 산림령·광업령·어업령을 발표해 자원의 권리를 독점하여 산업활동을 제한했다. 또한 일본말과 역사를 가르치고 '황민화'교육이 이루어 졌다.

    일곱째, 1910년대는 35년간의 악랄한 식민통치가 시작되던 시기였고, 세계사에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세계를 유린하며 자신들의 배를 마음껏 채우던 탐욕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도쿄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귀국 유학생들을 통해 국내로 전파됐다. 러시아에서는 재러한족회 중앙총회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미국에서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인국민회가, 중국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신한청년단이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3월 1일 정오 서울 종로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 음식점에서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중 늦게 도착했거나 중국으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침략행위, 무려과 강제에 의한 조선병탄, 야만적 민족말살정책을 격렬히 비판하는 독립선언서의 기본이념을 담고있다. 우리 선열들은 3·1운동을 통해 민족자립의 기초가 민족문화 향상에 있음을 깨닫고 민족각성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중국 만주에는 무장투쟁과 미주에서는 이승만의 외교활동, 안창호의 흥사단운동, 박용만의 무장활동 등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6·10만세운동이나 1929년 광주학생운동도 3·1운동을 재현하는 시위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훗날 카이로회담과 포츠담회담에서 한반도의 독립문제가 독립을 향한 자들의 노력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였다. 1930년대 들어서도 일본의 침략 야욕은 그칠 줄 몰랐다. 한반도에서 일본은 우리말을 쓰도 배우지도 못하게 했고, 각종 교육·학술 단체를 해산했다.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고, 징용으로 끌고갔고,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성노예로 희생시켰으며 공출제도로 강탈하고 창씨제도를 만들어 성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지자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를 기해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다. 1945년 8월 9일 대일 선전 포고를 한 소련군은 얄타회담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에서 위도 38도선 이북 지역을 점령했고, 미국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뒤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령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통치 이후 국토의 분단, 서로 다른 정부의 수립, 동족상잔의 6·25전쟁,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서울올림픽과 한·일월드컵, 외환위기 극복과 1조 달러 무역달성 등 짧은 기간에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겪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번영을,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사회적으로는 자유화를, 문화적으로는 개방을 이루워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신생한 140여 국가 중에서 오로지 대한민국이 산업화, 민주화의 대성취를 이룩했다. 해방이 독립운동 선열들이 흘린 수많은 피와 땀의 결실이었듯이 경제가 발전하고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 역시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에 앞장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의 덕분이다. 우리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길을 걸어갈 자원이 충분치 않고, 나아가는 도중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만나 좌절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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