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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참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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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박제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참모습

[칼럼=열린정책뉴스 김현태 논설위원]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은 '도산 선생의 이해' 를 위한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쉽고 간결하게 쓴 책으로 감명을 받았다. 아울러, 서울 강남 도산 공원에 세워진 기념비에 안병욱 교수가 쓴 도산 선생의 위대한 생애를 한눈에 들여다 볼수록 담아 놓았다.

도산 안창호는 일제의 침략에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60평생을 구국운동에 바친 위대한 애국자, 한국 민족을 인류의 모범이 되는 최고 민족으로 완성하기 위하여 부단한 자아 혁신과 국민의 품격 향상을 힘쓴 민중 교화와 교육자, 무실역행과 인격 혁명, 대공주의의 사상으로 민족의 지표와 역사의 진로를 밝힌 탁월한 사상가, 이상촌 건립과 사회 개혁, 산업 진흥과 교육 건설로 백년대계의 경륜을 보여준 훌륭한 선각자, 진실과 사랑의 실천으로 위대한 인격을 갈고 닦아 국민의 사표가 된 뛰어난 지도자, 그는 겨레의 등불이요, 나라의 자랑이다.라며 비문을 소개해 주었다.

선생은 '신민회를 설립'하였다. 1906년 미국에서 돌아와 전덕기·양기탁· 안태국·이동녕·조성환·신채호·노백린 등 당대의 민족지사들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는 봉건 군주체제의 '신민' 질서를 근대 민주체제의 '신민' 질서로 바꾸는 최초의 시민단체였다. 신민회의 목표는국권 회복과 공화제, 실력양성과 해외 무관학교 설립 등을 제시하고 실제로 이후 구권회복운동의 인적·정신적 원류가 되었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미국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교포들이 모아준 6천 달러를 가지고 상해로 뛰어와 각지에 산재한 지사들을 불러 모아 임시정부의 울타리를 짠것을 도산이었다. 그리고 국무총리서리와 내무총장으로서 초기 임시정부의 조직과 운영을 맡았다. 당시 국무위원급 이상의 정부요인 중에 상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도산 뿐이었다. 국내와 연결하는 연통제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 대일항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국무총리에 추대된 이승만은 1년 반 뒤에 부임했다가 탄핵을 당하고 말았다.

선생은 한국유일독립당 운동을 했다. 1920년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진영은 사분오열 상태였다. 이를 통합하여 대일 무장투쟁을 벌이는자는 신념에서였다. 이를 위해 중국 관내는 물론 해외 각지의 한인 사회를 두루 순방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성공은 못했으나 통합 연대론은 독립운동 진영에 공통적인 과제로 인식되었다.

선생은 흥사단을 조직했다.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8도 대표를 모아 시작한 흥사단은 무실역행을 생명으로 삼는 충의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덕·체·지 삼육을 동맹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결을 이루어 우리 민족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 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수양단체가 아닌 독립운동 단체였다. 여기에는 독립과 해방 이후까지를 대비한 비전이 담긴 흥사단이다.

선생은 한국독립당을창당했다.1930년 초에 결성한 한국당은 '당의'에서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며,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국을 건설하고, 내(內)는 국민 각계의 균등을 확보하고, 외(外)는 민족과 국가와의 평등을 실현하며, 나아가세계 일가의 진로를 향한다는 내용을제시했다.

선생은 '대공주의'의 정치사상과 철학을 가졌다. 도산은 1928년 상해 망명지에서 대공주의를 창안, 발전시키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삼았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도산의 대공주의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쌍벽을 이룰 만큼 체계적이면서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있다. 경제적으로본 대공주의는 이상사회 건설의 설계도니 도산은 침략주의에 대한 민족해방 사상, 정치적 민주주의사상, 경제적 착취에 반항하는 사회혁명 사상, 링컨의 민유·민치·민권·민생 내지 종족 상호부조에 근거한 자유연합사회 사상 등을 종합하여 그 모든 장치를 취하고 단점을 거한 조화적 건설 이념을 세우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면의 정책으로 민족평등·정치평등·경제평등· 교육펑등 등의 네 가지 등을 주장하였다.

지난 2013년 3월 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75주기이고, 5월 13일은 흥사단 창립100주년이었다. 스물네 살에 태평양을 항해하면서 하와이를 지켜보며 '도산'이라 자호한 뒤, 도산은 백범 김구 등과 함께 우리 독립운동사의 대명사일 뿐 아니라 민족 정신사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이자 호칭이 되었다.

선생은 도산(島山)이라는 아호를 지으면서 '반도강산' 의 뜻보다, 망망대해의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작은 섬의 기개에 감동을 받아 지었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4대강 사업을 합리화하기 위해 '안창호 씨의 국토개조의실현' 운운하며 도산을 욕보이고, 세간에서는 무실역행의 참뜻보다는 일제와 그 아류들이 붙인 자치론자, 개량주의자, 준비론자, 점진주의자,실력양성론자, 문치파(文治派), 평안도파, 독립불가론자, 도덕군자의 수준으로 도산을 왜곡하여, 도산 선생이 그야말로 심각하게 왜소화되고 있는 형편이라고 지적하고 있어 이에 놀람을 금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 애국자의 구국일념을 펜끝으로 하루아침에 무너뜨리 다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통한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도산은 교육자, 교양인, 웅변가, 종교지도자 등 '박제된 독립운동가'로 인식되거나, 좀 더 관심을갖는 사람들에겐 훌륭한 인격자, 흥사단 설립자, 애국가 작사자로 알려져 있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실체의 절반도 되지 않고, 본질에서 절반의 절반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교육과 홍보를 통해서 사실이 왜곡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두려위해온 세력은 무장독립 운동가들의 과격파 또는 좌파로 치부하면서, 도산을 '온건한 독립운동가' 또는 '도덕주의자'로 분장시켰다고 하여 도산 정신과 도산 사상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 나게 한 것은 참으로 분통 터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밖에도 도산의 진면목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까닭은 이광수·주요한 등 친일파들이 도산의 전기를 집필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여기에 군사독재 세력을 비롯해 역대 보수 세력의 이념적 성향에 도산을 욱여 넣으려 한 일부 석공들의 '연구 성과'도 한 몫을 하게 되었다고 하니 놀라지 읺을 수 없다.

선생은 암울한 시대에 방향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의 스승이었다. 평양 모란봉 연설에서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다'라는 사자후를 듣고, 양곡상으로 거금을 모았던 남강 이승훈이 개심하여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남강은 오산학교를 세우고, 3·1운동을 주도했다. 도산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서거할 때까지 애국애족의 신념으로 일관했다.

선생은 철저한 민주공화주의자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서 싹트기 시작한 그의 민주공화주의 정치사상은 신민회를 결성하면서 실천 단계에 이르렀다. 신민회에서 제기한 민주공화제는 한민족사상 최초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는 미국 망명기나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기관의 우두머리가 되기보다 융합을 위해 노력했다. 모든 독립운동가와 단체를 모아 실력양성을 통해 무력으로 일제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고, 조국에 민주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던 장대한 비전을 품고 있었다. 도산 선생은 주위에서 우리나라에는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말을 듣고 '우리 중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라며 자신들은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라고 갈파했다. 도산에게는 시공의 상황과 인간적 한계가 있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강한 윤리성 때문에 극복해야 할 인간 관계 또는 정치적 과제를 놓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생의 인품, 능력, 역할, 업적을 종합 평가하여 나름대로 정의한다면, '투사와 신사'가 아닐까 싶다고 평가하고 있다. '투사'와 '신사'는 '둥근 삼각형'처럼 형용모순이지만, 도산에게는 이것이 가능했다. 그만큼 그의 삶에서 위대성을 찾게된다며 작가는 들려주고 있다.

또한,도산의 진면목과 업적은 추상화된 경우가 많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누구 못지않은 무장전쟁론자인데도 실력양성론, 점진론의 온건론자로 인식되고, 독립운동의 '투사'의 측면 보다 점잖은 인격자 '신사'로 자리 매김되었다. 또한 추종자 일부가 친일 변질자가 되고, 그들이 집필한 도산의전기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추종자 중에서 미군정을 비롯하여 독재정권에 참여함으로써 도산의 이미지에 흠집을 남기게된 것이 아닌가 싶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간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 날수 있다는데 화가 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다시는 이 땅에 그러한 일이 일어 나서는 안된다고 생각 한다.

역사의 깊이를 잘 꿰뚫어 보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몸 다 바친 선생의 구국의 일념을 한치의 오해가 없어야할 것이며, 도산 선생의 애국심과 구국 활동의 전 과정을 세세하게 잘 그려 주신 작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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